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나무를 심는다

어제 방 정리를 하다가 이불 빨래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불 겉커버를 열어보니 안에서 오리털 이불 충전재가 정신없이 다 빠져나와 있었다. 십 수년을 따뜻하게 지켜준, 교환학생 갈 때도 들고갔던 내가 정말 아끼던 이불이라 구멍이 나면 천 테이프를 붙여가며 오늘에 이르렀는데, 이제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주섬주섬 비닐 백에 넣기 시작했다. 이런 오랜 친구를 아무 생각없이 버리면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마음속으로 변명을 하기 시작했는데, 근 20년을 썼으면 이젠 오리털 이불도 그만 쉬고 싶을 것인데 나는 맨날 ‘벽에 똥칠하기 전에 이 세상 떠야지’ 하면서 진즉 이 꼴이 난 오리털 이불에게는 그것을 허하지 않았다고, 매번 이불 커버를 빨 때마다 오리털과의 전쟁을 해야했는데 이젠 손 쉽게 빨래를 할 수 있으니 더 깔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, 박사 학위도 땄으니 이제 지난 과거는 보내고 새 출발을 해야한다고 되뇌이며 이불을 정리했는데도 닳고닳은 이불보를 보니 또 다시 마음이 약해져서 쓰레기 통으로 들고가는 그 3미터 동안도 버리지 말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쓰레기통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돌아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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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그리움은 북유럽에 있다’라는 책에 있던 문장인데, ‘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나무를 심는다’는 말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. 책에서도 말했듯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심어준 나무 덕분이며 그 심어준 나무들을 잘 가꾸는 것은 마음을 받은 본인의 소임이기도 하다. 작년 말부터 마음이 많이 지쳐서 학위를 마무리하던 마지막 한 학기는 정말 가깝다고 여기는, 그간의 박사과정에서 지칠때 마지막까지 힘이 되어주었던 소수의 몇 몇 사람들에게만 기대어있었다. 비유하자면, 사람들이 내뱉은 상처주는 말들은 가시덤불 씨앗이 되어 뿌려졌었고 따뜻한 말들은 아름드리 나무가 될 씨앗이었는데 마음 관리를 너무 못해서 가시덤불은 정신없이 자라고 나무들은 관리를 못받고 막 자라 빛이 제대로 들지를 못해 비실비실 죽어가는 형상이었다. 그 와중에 그 소수의 사람들이 심은 나무는 마음 숲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오아시스 주위에 둘러 자란 나무들이었고 나는 그 작은 숲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그런 느낌. 잠시만 여기 숨어있다가 급한 불을 끄고나면 가시덤불 정리를 하고, 가지치기를 해서 나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게 만들자고 속으로 다짐을 했었는데 막상 급한불을 끄고나서 빼꼼히 오아시스 밖을 내다보니 저 가시덤불들을 어떻게 쳐내야 하나, 저 밖으로 어떻게 나가나 하는 생각에 두렵고 아찔해져서 펑펑 울었더랬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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비슷한듯도 다른듯도 싶지만, 오리털 이불은 관리하는데 따른 어려움 때문에 빨래를 자주 못해 그에 따른 문제가 분명 있었을텐데 어려서부터 함께하면서 많은 추억이 깃들어있다며 내가 늘 그냥 넘어갔던 것이고 가시덤불들은 분명히 나한테 상처를 주는데 어쨌든 이것도 추억이라며 말도 안되는 변명으로 계속 짊어지고 살았던게 아닌가 싶다. 실은 마음을 다잡은지 한 달이 더 넘은 지금도 가시덤불을 제대로 쳐내지를 못하고 있어서 여전히 마음이 어지럽다. 가시덤불을 어느 정도는 쳐내야 아름드리 나무들을 제대로 길러낼 공간을 만들텐데 말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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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리털 이불 없이 얇은 솜이불만 덮고 잔 어제는 역시나 으슬으슬하고 추웠고 아침이 되어 지나가면서 본 쓰레기통에 오리털 이불이 담겨있던 비닐봉지가 없는 것을 보니 가슴이 괜히 아렸다. 새로운 오리털 이불을 사기 전 까지는 얇아져 버린 이불에 괜한 허함을 많이 느끼기도 하겠지만 곧 적응을 하겠지. 그리고 좀 더 빨래도 자주할 수 있을 것이고 좀 더 푹신한 오리털 이불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. 가시덤불을 쳐낸 자리도 쳐내는 순간은 주저하게 되고 쳐내고 나서는 분명히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내 아름드리 나무들이 잘 자라 더 건강한 숲을 이루겠지. 사람들이 나눠준 좋은 나무의 씨앗만 남겨 좀 더 건강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.